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칼라스 (문단 편집) === 1950년대 후반 === 그녀는 완벽주의적인 성격으로 유명했고, 이탈리아 음악인들 사이에 그녀는 호랑이라고 불렸다. 극장 경영진, 상대 배역의 테너, 지휘자들과의 불화도 늘어갔다. 1955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안드레아 셰니어 공연을 할 때 타이틀 롤을 맡았던 [[마리오 델 모나코]]와 무대 뒤에서 다투기도 했다. 1956년과 1957년은 그녀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짧은 전성기 이후 칼라스는 생각보다 일찍 꺾이기 시작했다. 1956년 6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빈 국립 가극장]]에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타이틀 롤로 데뷔했다. 하지만 빈 국립 가극장과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 되었으며 이후로는 더 이상 빈에 초청받지 못했다. 1956년 10월에는 대서양 건너 미국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노르마 역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이때도 스캔들이 일어났는데, [[타임(주간지)|타임]]지에서 칼라스와 라이벌이었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사이의 관계나 어머니와의 불화 등에 대해 소상히 게재한 기사를 실은 것이었다. 이후 칼라스는 1958년 11월 해고될 때까지 2년간 메트 무대에 섰는데, 메트 총감독 루돌프 빙과 많은 갈등을 빚게 되었다.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극장의 노르마 공연은 그녀의 몰락을 상징하는 [[흑역사]]로 널리 언급되고 있다. 공연 직전에 목이 부어오를 정도로 상태가 안좋아 의사나 매니저가 출연 취소를 간청했음에도 감독이 '누구도 칼라스를 대신할 수 없다'면서 억지로 칼라스를 무대에 올렸고 칼라스는 제1막이 끝나고 공연 취소를 선언하고 극장을 나가버렸다. 극장측은 관객들이 칼라스의 노르마를 잔뜩 기대하고 있다며 대역을 준비해 두지 않았고, 칼라스는 이에 자신이 아프게 되어 공연을 못하게 될 경우에 대해 항의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극장의 책임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설령 대역을 쓰려 해도 감히 칼라스의 대역으로 노르마 역을 노래하려고 선뜻 나서는 이가 없어 그대로 공연을 강행했다가 사달이 났다. [[파일:/mypi/gup/48/1727_1.png]] 게다가 하필이면 그 날 공연이 이탈리아 대통령 등 정계 고위층들이 임석한 중요한 이벤트였던 터라, 공연을 망친 칼라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이탈리아에서 대단히 빠르게 확산되었다. 당시 제작된 뉴스 필름의 아나운서 멘트도 비꼬는 투가 다분했을 정도.[* '칼라스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다면 공연보다는 리허설 때 오시는게 나을 겁니다'라는 투였다.] 물론 여기에 가만히 있을 칼라스도 아니었고, 곧 극장과 언론사를 향해 고소장들을 날렸다. 후에 마리아 칼라스는 이 고소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대역을 준비해놓지 않아 이탈리아의 고위층들이 공연장을 나가게 된건 전적으로 극장의 책임이었고, 일부 언론사들이 거짓된 내용의 기사를 만들어서 내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밀라노 팬들이 마리아 칼라스의 보이콧을 요구하는 등 이탈리아에서 여론이 매우 험악해졌다. 1958년 5월 칼라스는 오랜 갈등을 빚고 있던 밀라노 라 스칼라 가극장의 총감독 안토니오 기링겔리와 다툼 후에 앞으로 더이상 스칼라좌 무대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잔여 계약을 파기했다.카랴얀은 기링겔리에 대해 무척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카라얀과 기링겔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1955년 발퀴레 공연 취소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기링겔리는 바그너의 대작 발퀴레를 스칼라좌 무대에 올리는 회심의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지휘자는 카라얀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베를린 필의 수장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면서 카라얀이 그의 대타로 베를린 필의 미국 공연을 지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기간이 밀라노에서 예정되어 있던 발퀴레 공연 기간과 겹쳤다. 하지만 베를린 필 최초의 미국 순회 공연 기회는 카라얀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공연이었고,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기링겔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카라얀의 발퀴레 공연 스케줄을 취소해 주었다. 이후 카라얀은 순식간에 세계를 대표하는 지휘자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스칼라좌는 카라얀과 원만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카라얀은 1956년 이후 베를린 필, 빈 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이외에 다른 오케스트라는 거의 지휘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 유일하게 지휘했던 곳이 스칼라좌였다. 1958년 11월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총감독 루돌프 빙이 칼라스에게 계약 해지를 알리며 그녀에게 해고를 통보해 왔다. 루돌프 빙은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칼라스와 나 둘 중 누가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인지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습니다. 물론 그때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은 나였습니다. 그래서 칼라스에게 계약을 끝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나운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칼라스를 해고하신 건가요?) 해고라는 표현을 쓰고 싶으시면 그래도 됩니다. 하지만 저는 단순한 해고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칼라스와의 모든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것입니다." 메트에서 해고된 후 미국 [[댈러스]] 오페라와 계약을 맺고 50년대말 한때 이 곳에서 한동안 많은 무대에 올랐다. 사생활 쪽에서는 1957년에 그리스의 선박왕이었던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만나 눈이 맞으면서부터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었다. 1959년 8월 오나시스는 자신의 호화 유람선 크리스티나호에 칼라스 부부를 초청했다. 그가 리 라지윌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를, 그밖에 다른 수많은 여자들을 꼬실 때도 항상 크리스티나호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오나시스에게 반한 칼라스는 메네기니와 이혼하려 했다. 칼라스는 메네기니가 자신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수입의 일부를 시동생들의 사업자금 등 시가(媤家) 식구들을 위해 무단으로 써버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메네기니는 이혼을 원치 않았다. 칼라스와 메네기니는 이혼 소송에 들어갔지만 당연히 이탈리아 법원은 귀책 사유가 없는 메네기니의 손을 들어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